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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디자인/디자인

프로젝터가 '본다'는 것

 

프로젝터는 자신보다 타인에 관심이 있는 존재들이다

 

 

프로젝터는 ‘본다.’  프로젝터라면 ‘프로젝터가 자신보다 타인에 관심이 있다’는 그 말이 뭔지 알 것이다.

 

프로젝터임을 모르던 시절, 나는 “누군가와 마주 보고 대화하면 그 사람의 뒷면이 보이는 것 같다.”는 말을 지인들에게 한 적이 있다. 정말 뒷면이 눈으로 보이겠냐마는, 최대한 말로 표현해 보자면 그랬다. 지인들의 알쏭달쏭하다는 표정 때문에, 나도 이게 일반적인 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내게 ‘보이는’ 것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위치다. 그 위치란 물리적 시공간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무한한 시공간 속에서  여러 가능성이 펼쳐진 좌표다. 또 하나는 상태다. 그 사람이 거기 위치함으로써 어떤 영혼의 상태를 갖는가다. 그게 보이는 건지, 들리는 건지 뭐라 표현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초점이 있는 감각이다. 휴먼 디자인에서는 프로젝터의 초점이 제너레이터의 G 센터(방향성, 정체성)를 치고 들어간다고 말한다. 나의 경험으로 비추어 봐도, 그것만큼 정확히 이 감각을 설명하는 말은 없었다.

 


 

다른 프로젝터가 어떻게 ‘보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다 다른 방식으로 볼 것이다. 어떤 방식이나 강도로 보든지간에, 뭔가 보이는데 거기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들이대지 않기란 참 힘든 일이다. ‘요즘 괜찮니? 이렇지 않니? 저렇지 않니? 뭐 도와줄 건 없니?’

 

그 결과로 겪게 되는 건 언제나 씁쓸함이다. 물론 어떤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보냐며’ 놀라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좀 더 총체적으로 내 삶 전체에 대해 회상해 보자면 그건 씁쓸함이었다. 그 재능은 그저 남들 하소연 들어주는 데나 유용할 뿐이었고, 정작 나는 내 일이 아닌 듯한 일을 하며 진짜 필요한 수준의 인정을 받지도 못하고 성공했다는 느낌도 없었다. 날 둘러싸고 있는 건 내 진짜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 하소연할 준비가 되어있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인정욕, 그게 프로젝터의 최대 약점이자 함정일 것이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기 때문에 무리해서 노동을 하고, ‘내가 본다’는 사실을 어필하며 묻지도 않은 도움을 주려고 한다. 값싼 인정에 매이게 되기도 쉬울 것이다. 잘못된 방식으로 인정해줘도 그게 눈물겹게 고마워서 없는 힘을 쥐어짜며 눌러앉아 있는게 프로젝터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신의 값어치가 떨어지고 점점 더 쓴맛을 느끼게 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프로젝터의 경우 그건 아무 때나 눈에 띄고 들이대는 것이다. 그걸 멈추고 나면,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뭘 해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인정에 대한 결핍으로 스스로의 값어치를 떨어뜨려 왔으며, 관심을 끌기 위해 비굴했었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는지 말이다. 얼마나 사람들에게 안달나있고, 시끄럽고, 애잔하게 보였는지 말이다. 

 

초대를 받아 움직이면 그 즉시 삶이 나아진다. 이것만 해도 반이다. 일상 속 사소한 것부터 시도해 볼 수 있다. 침묵에 익숙해져야 한다. 누군가 “네 생각은 어때?”라고 물어봤을 때 얘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내 생각을 얘기했을 때 그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의 차이를 느껴볼 수 있다. 그건 엄청난 차이다. 하물며 더 큰 일에선 어떻겠는가? 

 

나머지 절반은, 얼마나 교육받고 훈련받느냐에 따라 달렸다. ‘본다’는 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언제나 상대방이 다음 스텝을 스스로 찾아가게 하기 위해 해야 할 적절한 질문이나 태도를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저 얘기를 들어주는 데 그치거나, 혹은 내가 아는 것을 강요하는 실수를 하곤 했다. ‘본다’는 원석은 정말 쓸모없이 낭비되기 쉽다. ‘본다’는 걸 누군가를 진짜로 가이드 할 수 있는 역량으로 활용하기 위해선, 거기서부터 다시 먼 길을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