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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디자인/실험 일지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 '내부 권위 없음'

나는 내부 권위가 없고, 목 미정에 G 센터 오픈인 프로젝터다.


휴먼 디자인 실험을 하면서 일정 수준 이상 전략과 권위(내부 권위에 대한 시행착오), PHS를 따르고,  미정 영역을 존중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면서 느끼는 것은, 무엇을 하기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선택지가 있다. 매력적이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 내 흥미를 돋우는 일, 마트에 진열된 온갖 물건과 맛있는 음식…. 그런데 이것들은 대부분 내 것이 아니다. 실제로 디자인상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건 너무나 적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줄이고, 먼저 말을 걸지 않고, 초대를 통해서만 움직이고, 누가 소개해 준 카페만 다니고, 내 몸에 맞지 않는 건 먹지 않는다. 절대 완벽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내가 사는 삶은 이전보다 극도로 제한되고 절제되고, 그래서 단순한 삶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건 분명한 내 것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살다 보면, 아주 가끔씩, 내게 진짜 허용되는 것이 온다.
 


모든 것에 문이 닫혀있다가, 그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건 거의 명령처럼 느껴진다. 그럴 땐 내가 굳이 뭘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이미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는 것 처럼 너무나 부드럽게 일이 풀린다. 현실적으로 어렵다 느껴지는 상황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버린다.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오히려 혼날 것 같다. 내가 선택한다기보다는 강제적 힘에 의해 옮겨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너 이제 여기로 가라'라는 하늘을 가르는 쩌렁쩌렁한 울림이 있고  뭔가가 번개처럼 위에서 아래로 나를 관통한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냥 복종하는 것이다.


이 정도의 감각이, 진짜 내게 허용되는 것에 대한 감각이다. 내가 평소에 욕망하는 작은 것들을 그때그때 들쑤시고 다니면서는 이를 경험할 수 없다.


삶에서 이러한 순간을 몇 번 만났는데, 실험을 한 이후로는 이런 일들이 좀 더 자주(그렇지만 여전히 드물게), 그리고 의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 나타난다. 아마도 내가 하지 말아야 할 선택을 안 하면서 혼탁해진 것이 빠져나가며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한다. 실험을 지금보다 더 타이트하게 오랜 시간 누적해서 할 수 있다면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내부 권위가 없이, 외부 권위에 특화된 디자인으로서의 경험이다. 내 아버지는 처음 보는 길을 갈 때 지도나 내비게이션으로 길을 찾지 못하는 분이었다. 대신 산세를 보면서 길을 찾곤 하셨는데, 참 놀라운 능력이었다. 내부 권위가 없다는 게, 좀 비슷한 느낌이 아닌가 한다. 내부 권위가 없다는 건, 남들과 똑같이 길을 찾아야 하는데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진 내비게이션이 없는 거라고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이 내비게이션을 보는 사이, 산과 태양의 위치를 보는 것. 그러다 보면 적어도 그 지형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는 것. 그런 게 내부 권위 없음의 길 아닐까. 내가 아직 클리어하게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지표가 있고, 이것도 괜찮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점점 이 여정에 대해 신뢰할 수 있게 되어간다.
 
 

 
 

요즘 이사에 대한 필요가 있어서(지구에 들어왔던 19번 관문의 영향인지) 집도 알아보고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그 들썩이는 마음과는 별개로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안다.내 욕망, 내가 가고 싶은 방향, 내 감정이 있지만, 내가 이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게 뭔지 알아가고 있다. 또한 아직 진짜로 내가 떠날 수 있는 지점에 다다르지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 내가 선택하지 않더라도 어느 지점쯤 와 있는지는 알 수는 있다. 아직 내게 떠나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여기엔 움직임이 있다. 실제론 움직임이라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겐 움직임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에는 절차와 순서가 있고, 그 일이 허용되기 위한 기하학적 정렬이 필요하다. 움직이게 될 수 있도록 허용되기 전에, 내가 마쳐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존재하는 사건을, 나의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 나가는 느낌으로 경험된다. 공간을 옮기는 것, 누군가와 관계 맺는 것,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것. 모든 것이 이런 식이다. 이 시간을 인내하며 내가 해야 할 일상적인 일들을 해나가고 완결하는 것. 그것이 정렬의 열쇠다.


전략과 권위를 따르려고 하다 보면생각보다 모든 일이 아주 천천히 간다나를 위한 것은 아주 적고, 거기엔 순서와 절차가 있고, 다음으로 넘어가려면 완결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여정은 진정한 삶의 놀라움을 맛보게 한다.